신은 언제나 변덕스럽다. 때문에 인간에게 조건 없이 주어진 힘은 이유 없이 사라진다.


 사니와에게 있던 사물의 의지를 끌어내는 능력은 어느 순간 힘을 다 한 것처럼 기화했다. 가까스로 남은 흔적이요 증거는 이미 현현되어있는 남사들 뿐.


 겨우내 아름다움을 과시했던 눈동백은 때가 되어 시들고 빛이 바랬다. 사니와는 그 모습이 마치 저와 같다고 생각했다. 의미 없는 자조다. 한숨을 내쉬며 곁에 있는 작은 짐꾸러미를 들어올린다. 작은 만큼 무게 역시 가볍다. 이곳에서 쌓은 자신의 명예도 고작 그 뿐이리라.


 "이걸로 끝인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남사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오사후네 도파의 태도, 다이한냐 나가미츠. 연이 닿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검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서 말이야. 너 같은 사람에게 구애 한 번 못 해보고 넘어가는 건."


 뭐, 그는 그런 검이었다. 사니와는 그런 다이한냐 나가미츠가 썩 좋았다. 고운 말을 해주는 이가 싫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별 건 아니고, 그간 고생 많았어. 이리 와."


 은발의 검이 사니와에게 두 팔을 벌린다. 본디 그의 주인이었던 이는 스스럼 없이 품에 안겼다.


 "이제야 겨우 한 번 안아보네."


 전부 끝나갈 때서야 말이야. 검 역시 주인과 닮은 꼴로 자조하며 웃었다.


 "봄이지. 기온은 따뜻해지고, 벚꽃도 한창 피어나고, 생명들이 되살아나는."


 다이한냐 나가미츠는 사니와의 등을 토닥였다.


 "네게도 새로운 시작이 함께하길 바라고 있을게. 이곳에서."


 검이 주인에게 남긴 것은 마음 뿐만이 아니었다. 사니와는 제 머리를 장식한 무언가를 만져본다. 굳이 보지 않아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눈동백, 그와 닮은 꽃.


 "눈꽃이 필 때쯤이면 다시 나를 생각해줄래?"


 또한 아스라이 바스라져 사라질 것만 같은 미소를 남기고.


또각또각.


마루 위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신발굽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또각또각, 끼익, 또각또각.


마루 위에서 눈을 감은 채 춤추는 이는 키가 큰 여성이자 자신의 주인이다.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무무(巫舞)라던가. 조만간 있을 회합에서 몇몇 사니와들과 함께 선보일 춤이라고 하였다.


아니, 선보인다기엔 조금 다를까. 강제로 하게 됐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통지를 받고 난 이후 진저리 치는 모습을 보았으니 대강 어림짐작 가능했다.


또각또각, 스르륵.


주인은 미끄러지듯 무릎 꿇어 앉는다. 그리고 감았던 눈을 뜬다.


왔으면 얘길 하지.


녹색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향한다.


어땠어?


나와는 달리 그녀의 말엔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는다. 이번에도 그저 궁금할 뿐이겠지. 늘상 있는 일이었다.


굉장해! 늘 예쁘지만, 이번에도 예뻤어.


사실이다. 내 모든 말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을 담고 있었다.


너무 예뻐서 넋놓고 보느라 인기척도 못 냈네. 미안.


그러면 주인은 우스갯소리를 들었다는듯이 웃어넘긴다.


또 그런 농담따먹기 한다.


농담따위가 아닌데. 항의를 하고자 입을 벌렸으나 이내 머리를 후려치는 생각에 입을 다문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지.


아니, 아니다. 한 번 더 정정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가 다른 것 뿐이다.


다름은 다름이다. 옳지 않은 틀림이 아니며 그저 같지 않다. 오직 그러했을 터임에도 한번 깨닫고나면 모조품에 불과한 심장이 아려온다.


있지, 주인은 내가 귀여워?


어차피 내가 듣고 싶은 답은 나오지 않으리라.


물론, 귀엽지. 카슈가 제일 귀여워.


거짓말쟁이. 당신은 나를 귀여워만 하잖아. 나는 제일이 될 수 없어. 당신의 제일은 다른 녀석이니까, 나는 안 되잖아.


목끝까지 차오른 불평은 당연히 내뱉지 못한다. 쓴맛이 나는 언어를 집어삼키고 낯에 거짓된 미소를 끌어올린다.


주인이 나를 귀여워해줘서 다행이야.


아니, 전혀 다행스럽지 않아. 나는 언제고 불행했어.


나는, 카슈 키요미츠는, 거짓말쟁이 주인을 사랑하며 그 자신 또한 거짓말을 고하는 거짓말쟁이다.


또각또각.


제게 한 번 미소지어준 주인은 다시 한 번 무무를 춘다. 거짓말쟁이의 춤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가슴이 시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刀剣乱舞-ONLINE- > 동인설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냐사니] 봄과 눈동백  (0) 2018.08.07
[오오사니] 별하늘  (0) 2018.05.14
[소네사니] 파문  (0) 2018.04.30
[츠루사니] 찬란함과 눈부심  (0) 2018.04.27
[코기사니츠루] 섣달그믐의 첫 축제  (0) 2018.04.26


달이 모습을 감춰 별빛이 쏟아지는 밤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몸. 이러한 밤이 되면 검인 자신도 조금, 감성적이 되곤 한다.


끝없는 정적, 이어지는 고요. 얄팍한 바람에 흩날리는 것은 붉게 물든 단풍과 제 머리칼. 오롯이 홀로 남은 이 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락사락.


의미없는 발걸음을 옮긴다.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제 행동이 스스로도 이해가지 않는다. 잔디가 밟혀 기분좋은 소리를 낸다. 요 근래에 자주 보이는 인조 잔디가 아니다. 전부 살아있는 식물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별빛이 밝다. 찬란하다는 말이 부족할만큼이나 밝았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가까이서 보면 좋으련만, 이곳에 망원경 같은 물건이 있을 턱 없다. 시선을 하늘로 두고 발 닿는 장소로 움직인다. 어딘가 별 구경하기 좋은 위치가 있으리라.


이윽고 도달한 곳은 다름아닌 유리 온실. 한참도 전에 만들어졌지만, 왜인지 쓰이지 않고 식신에 의해 관리만 되던 장물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도 없을 장소이기도 했다.


안녕, 바보짓이라도 하러 왔어?


길고 검은 머리칼, 녹색 눈. 저희를 통솔하는 영수다.


말버릇 하곤. 너야말로 뭘 하는 거지?


영수의 발밑을 훑어본다. 하얀 원통과 그를 원조하는 검은 받침대. 천체 망원경.


별 구경.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거든. 그래서 이렇게 공해 없이 별을 볼 기회가 적었어.


아이는 천천히 무언갈 조작했다. 어렴풋이 모양만 아는 저로서는 무슨 조작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달이 덜 밝으니까 별이 많이 보이잖아. 문뜩 생각나더라고. 사놓고 잊었던 게.


조잡한 움직임이 멎는다. 영수는 거리낌 없이 본체를 돌려 제게 향했다.


기왕이니 당신도 볼래? 제법 볼만해.


순수한 호의였다. 거절할 이유는 없다. 유리알 너머 풍경은 별세계였다. 보랏빛 비단에 수놓인 색색의 금사. 쏟아지는 별무리. 별과 별, 별, 그리고 별.


예쁘지?


영수는 맨눈으로 하늘을 올려보며 만족스레 웃는다. 별이 가득한 하늘보다도 소담스러운 풍경이었다.


못을 가로지르는 파문은 비단 잉어로부터 시작되었다.


붉음, 검정, 하양.


다시금 붉음, 검정, 하양. 드물게 노랑.


색색이 화려하게 물든 비늘은 좋은 먹이와 좋은 환경 덕택에 거무죽죽하게 변할 틈이 없었다.


당신은 나와 닮았네. 어떻게든 확인 받고 싶어하는 점이.


이제와 그런 말이 떠오를 이유는 뭐란 말인가. 괜한 억하심정에 자갈밭을 검집으로 긁어내린다. 자갈이 자르륵 소리를 내며 굴러나간다.


다른 명도들과는 다르다. 자신은 명도를 흉내낸 위조품이다. 허나 좋은 검임은 틀림 없다. 허나, 허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열등감이 싫다. 위작이라는 꼬리표는 진절머리가 난다.


이 못에 있는 비단 잉어는 좋은 혈통이랬던가. 잡념을 끊어내려 또 다른 잡념을 끌어내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나는 비단 잉어만치 못한 존재란 말인가. 부정적 흐름을 막을 수 없다.


풍류는 모른다 하지 않았어?


배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리었다.


몰라도 구경쯤은 할 수 있지.


차마 네 탓이라곤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의 주인에게 인정받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가오는 기척이 있다. 무시하고 싶었다. 그러나 물상신의 본능은 그를 허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눈과 눈이 마주친다. 치켜올라간 네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진다.


위작이니 뭐니 하는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는 중이었겠지. 그렇지?


허점을 파고드는 솜씨는 여전히 매섭다. 건방지기 짝이 없다. 마땅히 그러하듯 나는 굳이 답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시선을 돌린다.


붉음, 검정, 하양. 드물게 노랑.


거봐. 당신은 나와 닮았다니까.


제게 꽂한 시선이 사라진다. 못에 인 파문이 빛에 반사되어 선명해졌다, 이내 흩어진다.


당신은 명도야.


자갈 하나가 못에 떨어진다. 파문과 파문, 사방으로 흩어지는 잉어떼.


굳이 이름 따위에 신경 쓸 이유는 없어. 당신은 내 명도니까.


손쉽게 부정하고, 긍정한다. 네 그런 점을 닮고 싶었을지 모른다.


나가소네 코테츠는 곤도 이사미와 이 사니와의 어엿한 명도야.


잉어떼는 자갈 하나 치 위협에 저 밑으로 숨어들었다. 못에 파문은 없다. 잔잔한 수면 위로 비추는 것은 나와 너와 빛 뿐.


드물게도 뙤약볕 아래 누워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인다. 썩 먼 거리임에도 인기척을 느꼈는지 입을 열었다.


있지, 찬란함은 쉽게 무너져.


볕은 뜨거우나 아직 매미가 우는 계절은 아니다. 기껏해야 풀벌레가 우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이럴 때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는 또 '그거'겠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지?


하얀 원피스가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눈이 부셨다.


그냥, 혼자 있으려니까.


가느다란 팔이 제 눈가를 가린다.


명상이라도 했나보아.


작게 웃음 소리가 들린다. 유리 구슬이 구르는 소리 같았다.


그런 거 아냐.


팔이 내려간다. 검은 속눈썹 밑으로 초록빛 눈이 드러난다.


곁에 있지.


마음대로.


이외의 별다른 대화는 없다.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만해진다.


*


옷은 흰색 하나로도 충분해. 전장에서 붉게 물들면, 답게 되잖아?


눈을 감으니 과거의 편린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분명 제가 막 이 혼마루에 편입했을 적이다.


이상한 취향이네.


초대면부터 한 대화라곤 믿기지 않으리라.


다치는 게 좋은 사람도 아니고.


불퉁한 말이나 웃는 낯이었다.


왜 다치는 쪽이 나라고 생각하지?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린다. 네가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다. 그 모습이 썩 귀여웠다.


적의 피일지 누가 아나.


안개처럼 부옇던 추억이다. 그곳에 오로지 너만이 선명했다.


헌데 아가씨는 이미 학이 되었군.


흰 소매에 묻은 핏자국. 옅은 피냄새. 당시의 내가 아닌 지금의 내 감정이 타들어간다.


고양이한테 긁혔어. 목욕시켜줬거든. 고양이는 물을 싫어하잖아.


상처, 고양이, 물.


지금의 나는 네가 찬란하다 생각한다. 부실만큼.


*


츠루마루, 당신은,


적막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무엇을, 하고 되물으려던 입을 다문다. 나뭇잎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글쎄.


타들어가는 감각을 기억해낸다. 네가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그러나 그 찬란한과 눈부심은 아직도 선연하다. 인간의 모방에 불과한 심장이 뛴다.


무너지지 않을 찬란함이라면, 의외성과 놀라움이 있어 좋다 생각한다만.


초록은 안정감을 준다던가. 희한하게도 내게는 그리 효과가 없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지.


또 한 번 웃는 소리가 퍼졌다. 유리구슬이 굴러간다.


당신 진짜 이상해.


녹색 눈에 오롯하게 나만이 비추어진다. 충만함이 만족감으로 바뀐다.


그것 참 감사하군.


칭찬 아니야.


볕은 여전히 뜨거웠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보통날이었다.

'刀剣乱舞-ONLINE- > 동인설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오사니] 별하늘  (0) 2018.05.14
[소네사니] 파문  (0) 2018.04.30
[코기사니츠루] 섣달그믐의 첫 축제  (0) 2018.04.26
[소우사니] 새장 속 새  (0) 2018.04.26
[쇼쿠사니] 질투의 색  (0) 2018.04.25


섣달그믐, 달이 해를 삼키고 자시를 넘어 축시. 얼어붙은 밤을 달래는 노래는 허공의 카구라. 상냥한 음색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깨비불을 선두로 한 백귀야행 행렬이 본성 바로 앞을 지나간다.


불, 요괴, 요괴, 불. 그리고 또 요괴.


믿음이 지고 바스라진 오늘날에 와선 흔치 않은 광경이다. 허나 이나리의 검은 그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다. 관심을 두는 것은, 검은 머리의 인간 뿐.


무얼 그리 보십니까?


인간은 줄지어 흘러가는 요괴 무리에 눈을 떼지 않고 답한다.


이런 건 처음 봐서. 좀 감동하는 중이야.


찬 바람이 검 한 자루와 인간 한 명을 감싸안고 지나간다. 눈동백이 흩날린다.


먹을래?


인간은 몸을 움츠리는 대신 제 옆에 놓인 흰 찹쌀떡을 제게 밀어놓는다.


괜찮습니다. 검인 몸, 어찌 주인의 것을 탐내겠습니까?


그제야 인간은 고개를 돌려 여우를 바라본다. 새싹을 닮은 눈이 투명하게 그를 비춘다.


먹어도 상관 없는데.


상관 없기는. 여우는 주인의 주전부리를 만든 자를 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 장난질을 즐기는 흰 학. 답지않게 주방을 들쑤시는 모습을 보았더랬다. 그 자의 투기를 사서 좋을 일 없다. 검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깝게.


푸르른 눈이 다시금 백귀야행을 향했다.


찍어두고 싶은데, 기계로는 담을 수 없겠지.


예에.


여우는 더이상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눈발이 흩날린다. 주인은 추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묵묵했다. 가끔 길 잃은 도깨비불이 근처를 스쳐지나가도 미동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새해라고, 여우는 생각했다.

'刀剣乱舞-ONLINE- > 동인설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오사니] 별하늘  (0) 2018.05.14
[소네사니] 파문  (0) 2018.04.30
[츠루사니] 찬란함과 눈부심  (0) 2018.04.27
[소우사니] 새장 속 새  (0) 2018.04.26
[쇼쿠사니] 질투의 색  (0) 2018.04.25


괜찮습니까? 새장 속 새를 바깥으로 내보내도.


언제나 같은 답을 바라며 같은 농을 친다. 상대는 다른날과 꼭 같은 답을 한다.


당신은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잖아.


연이 있는 자들과 형제가 있는 한 돌아온다. 그것이 상대의 생각이었다.


당신을 위해 돌아온다면 놀라 나자빠지시겠군요.


비웃듯 입가를 소매로 가리고 눈꼬리를 늘어뜨린다. 상대는 높은 확률로 헛소리를 들었단 반응을 보이며 질린 낯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어서 다녀오시기나 하시지.


천하 따윈 줘도 가지지 않겠다는 불손한 태도, 누구의 의에도 설 생각 없다는 느슨한 몸짓. 무엇 하나 예뻐할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결국 상대를 위해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저는 당신의 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새장에 갇힌 새가 아닌, 새장을 선택한 새이기에. 길들여진 이상 더는 바깥으로 나돌지 못 해.

'刀剣乱舞-ONLINE- > 동인설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오사니] 별하늘  (0) 2018.05.14
[소네사니] 파문  (0) 2018.04.30
[츠루사니] 찬란함과 눈부심  (0) 2018.04.27
[코기사니츠루] 섣달그믐의 첫 축제  (0) 2018.04.26
[쇼쿠사니] 질투의 색  (0) 2018.04.25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녹음이 우거진 풀냄새. 몇 번의 계절이 지났으나 내 안엔 네가 남긴 말이 남아 박혀있다.


질투는 녹색 눈을 하고 있어.

거짓말,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다.

숨탄것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질투를 해. 하지만 당신의 근본은 검이지.


근본은 검이나 지금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어. 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머리가 있고,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자유로운 두 팔이 있어.


그러므로 네 말은 모두 거짓이다.

내 질투는 황색 눈을 하고 있어.


*

톤보키리 씨는 좋겠다.

보통날의 일이다. 스스로도 하잘것없는 투정임을 안다. 그에게는 무엇도 잘못이 없다. 제겐 그저 분출구가 필요할 뿐이다.

무엇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 태도가 싫어.

그 아이가 잘 따르잖아.

내가 시기를 느낄만큼이나. 비집고 올라오는 열등감이 역겨웠다.

주군께선.

뜸을 들이는 시간이 영겁과 같았다.

상대를 가리고 계신다.

목이 타들어간다. 무슨 답을 바랐지? 쌍을 이루지 못한 한 눈에 어른거리는 잔상은 길고 검은 생머리였다.

네 불안정함을 눈치채셨을터다.

알아. 알고 있다. 자신의 상태조차 파악하지 못할만큼 녹슬진 않았다. 모를리 없다. 안다.

질투는 녹색 눈을 하고 있어.

왜 이럴 때,

나는 당신들을 질투해.

네 목소리가.

내 눈이 녹색인 것도 그와 관련이 있겠지.

그렇다면 어째서 내 눈은 황색이지? 보잘것없는 물음은 포말이 되어 사라진다. 너의 잔상 역시 사라진다. 반신이 은린옥척이었던 공주님이 그러했듯.


*

21세기 초에 숨탄것들은 어릴적 생존을 위해 질투라는 감정을 습득한다는 연구가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와 펜의 달칵임이 공허한 집무실을 메웠다. 눈가가 뜨겁다. 차오르는 것이 피인지 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질투를 하지 않는 것들은, 홀로 살아가는 것, 숨을 받지 못 한 것.

펜이 노래하는 소음공해가 멎는다. 하나뿐인 눈에 녹색 눈 한 쌍이 꽂힌다.

나는 당신의 감정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해.

이건 꿈이다. 지나간 언젠가의 기억이다.

내가 당신들을 질투하기 때문에, 당신도 동료들을 질투하게 된 게 아닐까. 감정은 전염되기 쉬우니까.

숨통이 조여든다. 더는 말하지 마. 내가 숨쉬게 해줘. 나를 부정하지 마. 믿어줘. 사랑해줘. 바라는 것은 한가지. 부디 내게,

너무 힘들면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게. 나는 도움이 안 될테니까.

종속되어줘.

이윽고 온전한 문장이 되지 못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시야가 온통 새빨갛다. 눈을 감아. 내가 여기 있어. 누군가의 부름에 이끌리듯 눈을 감는다. 흐르는 것은 피인가, 물인가.

한 방울, 두 방울.

마침내 눈을 뜨니 네가 있었다.

네가 있었다.

인간은 쉽사리 신을 원망하고 저주한다. 그렇다면 인간을 닮은 신은 누구를 원망하고 저주해야하는가. 자기 자신? 네게 답을 갈구했을 때 얻은 답은 간단했다.

타인이겠지.

이 얼마나 인간다운 답인가. 그렇다면, 나는, 지금, 너를 원망해도 되는 걸까. 허나 그러지 못함을 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인지하고 있다.

몸은 어때?

젖은 수건이 이마를 쓸어내린다. 녹색 눈이 황혼을 담고 노랗게 빛을 내었다. 내 질투의 색. 황색 눈이 그곳에.

손을 어 뺨을 쓸어주고 싶.

신열에 들떠 무얼 말하고 무얼 생각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무얼 말했어? 너는 무얼 말했어? 귓가가 멍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불확실성에 내던져진 미아라도 된 걸까.

다만 확실한 것은 눈가를 덮어오는 네 손의 온도가,

더 자자. 아직 식사 준비중이래.

평소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따스했다는 것.

'刀剣乱舞-ONLINE- > 동인설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오사니] 별하늘  (0) 2018.05.14
[소네사니] 파문  (0) 2018.04.30
[츠루사니] 찬란함과 눈부심  (0) 2018.04.27
[코기사니츠루] 섣달그믐의 첫 축제  (0) 2018.04.26
[소우사니] 새장 속 새  (0) 2018.04.26

+ Recent posts